EGOISM
WORLDLINESS
AU1-DRAGON
“진짜 닮았다니까, 그 애랑.”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나오는 빛이라곤 용의 검은 비늘에서 나오는 은은한 광밖에 없기에 자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세계의 손가락인지 볼인지 모른채로 한참 시선만을 돌렸다. 자아가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이 없자 세계-그의 앞에 있는 용의 이름이다-는 눈을 떴고, 비늘로 뒤덮여있던 곳에서 붉은 빛이 그제서야 나타났다.
“어디 아파? 심심해?”
“딱히.”
자아는 말하기 싫었다. 매번 세계가 ‘그 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다고. 오백년 전에 세계가 만났던 첫 계약자. 하지만 어떻게 말하겠는가. 자신이 치졸해보이는데. 그 위대한 용의 첫번째 계약자에게 차마 질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맨 처음 그가 말했을 때)-지금도, 미래에도.
왜 나는 두번째로 널 만났어야 했을까? 그 애가 아무리 계약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났었다고 해도, 만약 내가 널 처음으로 만났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었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분한 일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어느새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자아는 괜히 레어 안을 돌아다녔다. 역시 세계답게 전설의 검 같은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작은 보석광물 하나조차도.
"으... "
한참동안 자아를 바라보던 세계는 제 손을 들어 기운없어보이는 자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자신이 인간 상태가 아니란걸 자각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잘못하다간 날카로운 앞발톱이 자아의 머리를 뚫어버릴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 세계는 부르르 떨었다. 어서 인간으로 돌아가서 자아랑 놀고싶다... 자아는 세계가 그런 생각을 한걸 눈치챘는지 아닌지 슬쩍 보고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전쟁은 휴전중이었고, 세계가 상처를 회복하고 마나를 회복할 때까지 둘은 세계의 레어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오랫동안 오지 않았기에 회색산맥 아래에 있는 세계의 레어는 잘 정돈되어있지 않았고, 어둡고 습기차있어서 세계는 여기로 자아를 데려왔을때 부끄러워서 꼬리 아래에 숨고싶었다. 미리 정리좀 해 둘걸. 아, 오크 뼈는 왜 저기서 썩고있는거야. 내가 자리를 비웠을때 난리 쳤구나. 자아는 아무렇지 않게 한 구석에 텐트를 쳤고, 세계는 이내 자리를 잡아 용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직 옆구리쪽에 전쟁 때 입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반만 붙어있는 딱지를 보고 세계에게 자아가 다가왔다. 상처는 성인 남자 키 만했다. 인간일때는 겨우 한뼘이었는데.
"많이 아파?"
"아냐, 괜찮아."
용의 목소리는 고요하고도 웅장해, 동굴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인간일때의 목소리가 어느정도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음색 뿐이었으며, 자아는 처음으로 용일때의 세계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거북해했다. 아직도 자아는 용인 상태의 세계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다.
─자아의 부모님은 용에게 돌아가셨으니까.
자아가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는 세계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조용히 말했고 자아는 익숙하지 않은 올려보기를 하면서 세계와 대화를 나누었다.
딱히 할 말이 많지는 않았고 둘다 피곤했지만 시간은 많았다. 자아가 작게 말해도 세계는 들을 수 있다는게 좋았다. 자아는 얘기하다가 방금 말한게 용언인가? 라고 물어보았지만 세계는 그런거 사용한 적 없었다.
그들은 전쟁 전에 준비된 드래곤과 드래곤기사가 아녔고, 함께 이야기를 많이 나눌 때가 많다곤 할 수 없었다. 제국에는 항상 세네명의 드래곤기사와 이십이 넘는 드래곤 기사단이 있었지만 드래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십년마다 줄어만 갔다. 늙은 골드 드래곤과 전쟁을 할 수 없는 그린 드래곤, 내내 물에서 살기에 대륙에 오는 날이 적은 블루 드래곤까지 해서 세마리. 그게 다였으며 그들은 또 전쟁에 나갈 일은 없을거라고 믿었다. 제국민들과 귀족들, 용들 모두 다.
하지만 동양에서 들어온 기술을 이용해 만든 신식 공성포를 쓰는 성국 헤이스텐에게 드래곤은 예전처럼 더 이상 신의 사자도 축복도 아니었다. 레드 드래곤이 노쇠하여 죽자마자 성국은 대 제국 유리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구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 까짓거, 평화 사절단으로 가는 성국의 교황을 유리칸 내에서 습격당한걸로 꾸미는건 어렵지 않았을터. 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불꽃을 만들어냈다. 어느샌가 사실은 잊혀지고 피만이 남았다. 오랫동안의 평화에 잠식되어 나태해져있던 제국은 곧바로 쳐들어오는 성국의 최신식 군대에게 반격하지 못했고, 위기일발이었던 때에 ─
"우리가 나타났다 그거지? 옛날이야기같네."
"네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걸."
"왜?"
"네 자체가 옛날 이야기의 유산이니."
자아는 드래곤기사가 아녔고, 세계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블랙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둘은 전쟁중에 서로에게 끌려서 만났고 제국을 위해 싸웠다. 그 사이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너무 많지만 ...뭐, 일단 휴전되었으니까, 이대로 계속 쉴 수 있는걸까. 이야기 할 시간은 넘쳐났다. 자아는 적국의 총알에 날아갈뻔했던 목을 만지작거렸다. 임시 기사 군제복에 달린 훈장이 달랑거리며 희미한 빛을 반사해냈다. 세계는 일곱번째로 또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백년전에 세계가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을때의 이야기.
드래곤은 만년정도 산다고 하니까, 오백년전이라고 해 봤자 그에게는 아마 오년전쯤으로 느껴질 것이다. 세계는 그때 해츨링이었다고 했다. 자아를 만났을 때처럼 인간모습으로 만났고, 전쟁이 아니라 그때는 함께 여행을 떠났고... 자아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들었다. 즐거워보이는 목소리. 괜히 이야기 허리를 끊어도 본다.
"너 지금 몇살이라고 했지?"
"응? 천팔백."
"...그렇구나."
"으응, 그래서 그때 같이 산을 넘어가는데 내가 길을 잃어버려서 같이 숲속에서 자야하는데 이상하게 여름에 너무 추워서 자다가 눈을 떴더니...─"
자아는 말을 듣다가 텐트로 들어갔다. 뭐야, 자아야. 잘거야? 세계가 고개를 이쪽으로 내리들이밀었다.
"텐트 무너져, 가까이 오지 마."
"졸려?"
"응. 레어여서 그런가."
"레어 지저분하지... 청소하고싶다."
"용 모습으로 청소를 하다니, 말도 안돼."
"인간 모습으로 하면 일년은 걸릴걸. 용한테 맞는 걸레가 없어서 아쉽다..."
자아는 괜히 그 말에 웃었다. 세계는 입을 다물었다. 누워있으니 아까 그 애의 이야기를 하던게 또 떠오른다. 자신과 아주 닮았다고 했던 그 계약자...어디가 닮았던걸까? 혹시 선조려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국으로 돌아가면 궁내 도서관에좀 가봐야겠다고 자아는 생각했다. 아마 세계와 그 계약자는 책에 적히진 않았을거 같다. 얘기를 들어보니 기사로서 활동한게 아니었을테니까... ...아, 신경쓰지 말자.
자아가 잠들고 난걸 확인하자 세계는 축 늘어진 머리를 다시 올렸다. 그리고 혼자 맘속으로 생각했다. 자아가 깰 수 있으니까...
[다시 만나서 기뻐.]
오백년을 기다렸어. 같이 아파해도...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아마 말은 하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좋았다.